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레우코스 제국 (문단 편집) === 최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1stMithritadicwar89BC.png|width=800]] 기원전 89년경 셀레우코스 왕조 (청록색).[* 셀레우코스 왕조의 땅은 사실 기원전 2세기 말에 저 정도 수준이 됐다.] 위의 지도와 비교해보자. '''약 150년 만에 영토가 20분의 1 이하로 줄어든 셈이다.''' 안티오코스 7세의 전사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안티오키아와 그 근처의 시리아 지역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고, 왕실의 내전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막장 상황이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상태에서도 장장 수십 년 동안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룰 수 있었으니, 다름이 아니라 주변의 거대 세력들이 이를 완충 지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파르티아는 동쪽에서 쳐들어온 유목민들과 싸우는 한편 넓어진 제국의 세력을 굳히느라 여념이 없었고, 로마는 한창 폰토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땅과 돈만 많았다뿐이지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 상태인 데다, 내부의 권력 투쟁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비해 나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중흥 이후 상황이 더 나았던 이집트는 종종 셀레우코스 내전에 개입해 참칭자를 왕으로 세우고, 다시 적통인 군주를 지원해 갈아치우는 형식을 반복하며 그렇지 않아도 쇠퇴해가는 경쟁국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렇게 근근히 버티던 셀레우코스 제국이었으나, 기원전 82년 [[안티오코스 12세]]가 [[나바테아]]와의 전쟁 도중 전사하면서 파국에 이르렀다.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는 이 틈을 타 제국의 중심지인 안티오키아를 포함한 시리아 북부를 석권하였고, 다마스쿠스 역시 나바테아에 복종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아들 [[안티오코스 13세]]와 공동 왕으로 즉위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시리아의 몇몇 해안 도시에 그쳤다. 안티오코스 13세는 기원전 75년 로마를 방문하여 자신을 셀레우코스의 왕으로 인정하고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기원전 72년 티그라네스 2세가 다마스쿠스를 정복하면서, 양분되었던 시리아가 아르메니아의 영역에 귀속되었다. 이후 기원전 69년, 티그라네스 2세는 프톨레마이스를 공략하고 그곳에 있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붙잡아 처형했다. 하지만 [[루쿨루스]]의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했기에 급히 돌아가야 했고,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이 틈을 타 [[안티오코스 7세]] 계열의 [[안티오코스 13세]]를 옹립했다. 그러나 기원전 65년 [[필리포스 1세]]의 아들로, [[데메트리오스 2세]] 계열이었던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가 아랍 부족들의 도움을 받아 왕을 칭하면서, 내전이 또 발발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종식하고 시리아에 당도했다. 안티오코스 13세와 필리포스 2세 모두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내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시리아를 맡기면 위험하겠다고 판단하고 두 왕 모두 폐위한 후 시리아를 로마 공화국의 속주로 삼았다. 안티오코스 13세는 폼페이우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 시리아 부족장에게 암살되었고, 필리포스 2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기원전 56년 이집트 여왕 [[베레니케 4세]]와 결혼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이 되려고 했지만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된 뒤 곧 피살되었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